한남동 에스더쉬퍼 서울
에이버리 미공개 작품 전시
다정한 시선 담은 일상 풍경

마치 에이버리의 ‘Terrace Umbrella’(1990) <에스더쉬퍼> 덩그러니 놓인 보랏빛 순무,아침 먹는 거북이를 지켜보는 고양이,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비둘기에게 밥을 주는 남성의 모습. 거창한 철학적 담론이나 난해한 개념 미술이 범람하는 현대미술계에서 94세의 화가 마치 에이버리는 지극히 사소하고 다정한 일상의 모습을 캔버스 위로 불러 모은다.

마치 에이버리의 ‘Sumi Watching Bradamante Eat Her Breakfast’(2021) <에스더쉬퍼> 서울 한남동 에스더쉬퍼 서울에서 마치 에이버리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업실에 수십 년간 보관되어 온 미공개 작품 11점을 세계 최초로 공개한다. 그의 그림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어떻게 찬란한 예술이 되는지 보여준다.

마치 에이버리의 ‘Bird Man’(2015) <에스더쉬퍼> 작가는 20세기 미국 모더니즘 회화의 거장인 밀튼 에이버리와 샐리 마이클의 딸이다. 마크 로스코,아돌프 고틀립,바넷 뉴먼 등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들이 집을 드나들면서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자양분을 얻었다. 대학에서 미술이 아닌 철학을 공부한 작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줄 알았다”고 회고할 만큼 회화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마치 에이버리의 ‘Karla and Ann‘s Orchid’(2005) <에스더쉬퍼>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화단을 휩쓸며 화면에서 형태를 지워나갈 때도,에이버리는 꿋꿋이 구상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만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는 과감하게 단순화된 형태와 원색에 가까운 색면으로 화면을 재구성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
그의 작업은 독특한 시차를 두고 완성된다.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마주한 풍경을 드로잉과 사진으로 포착하고,추운 겨울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그 기억을 되살려 붓을 든다. 눈앞의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기억의 풍경을 그리는 셈이다.

마치 에이버리의 ‘Anatolian Coast’(1981) <에스더쉬퍼> 작가는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신,넓은 색면과 절제된 선을 통해 공간이 품었던 공기와 온도를 전달한다. 프랑스 남부의 강렬한 햇살을 머금은 테라스 풍경이나 터키 해안의 모습은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를 넘어 추상적인 색채의 장으로 확장된다.

마치 에이버리의 ‘Turnips’(2020) <에스더쉬퍼> 집 안인 사적 공간을 그릴 때 작가의 시선은 더욱 다정해진다. 화려한 정물 대신 식탁 위에 무심하게 놓인 채소를 주목하고,평생을 함께해온 반려묘와 거북이의 평화로운 일상을 응시한다.

마치 에이버리의 ‘Model and Louis’(1997) <에스더쉬퍼> 이번 전시는 에스더쉬퍼 서울이 밀튼 앤 샐리 에이버리 아트 재단과 긴밀히 협력해 성사됐다. 마치 에이버리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작품이 나오자마자 매진될 만큼 인기가 높다. 선명한 원색으로 빚어낸 그의 기억들은 일상이 곧 예술이며,가장 개인적인 기록이 가장 보편적인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시는 4월 2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