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며 경험한 윈드로스 팜의 소탈함,로열 오클랜드 & 그랜지의 완성도,와이헤케에서의 뜻밖의 환대는 서로 다른 얼굴의 뉴질랜드 골프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 끝에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골프 선진국이란 산업 규모보다 누구나 골프를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잭 니클라우스의 손을 거친 회원제 코스,입회비 1700만 원에 연회비는 620만 원 수준비슷한 시기에 코스를 현재의 27홀로 완성한 로열 오클랜드 & 그랜지 GC(RAAG)는 순백색의 철제 대문을 지나 클럽하우스에 도착하기까지 윈드로스 팜과는 성격이 다른 프라이빗한 클럽의 느낌을 받았다. 1894년에 설립된 오클랜드GC와 그랜지GC를 통합하여 현재의 1600명 회원을 유지하고 있고,수차례에 거쳐 리모델링된 코스를 최종적으로 잭 니클라우스가 손봐,지금의 그랜지·미들모어·타마키로 구성된 27홀 코스로 완성했다.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플레이해 본 니클라우스 코스 중 상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든 수준이었다. 미들모어는 그린 콤플렉스와 벙커링의 조형이 세계 10대 코스인 로열 멜버른을 벤치마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사점이 많았다. 그런 예측은 타마키 코스 1번과 2번 홀에서 확인되었다. 과거 타깃 골프로 공을 높이 띄워 홀컵을 공략하도록 설계한 잭 니클라우스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그라운드 게임으로 전환하며 전자와 후자를 적절히 섞은 코스 전략이 마음에 들었다. 북섬 킨로크 클럽에서 경험한 무자비하게 높은 난이도에 비해,RAAG는 다양한 수준의 골퍼들이 즐길 수 있는 ‘리스크 앤드 리워드(Risk & Reward)’와 초보자도 돌아갈 수 있는 루트를 마련한 설계였다.혼자 플레이하고 있는 나를 13번 홀까지 지나가게 하지 않고 슬로 플레이로 지치게 한 앞 팀(지금까지 세계 어디에서도 혼자 치는 골퍼를 먼저 플레이하게 배려하지 않고 방해한 팀은 없었다)을 기다리고 있는데,골퍼 두 명이 다가와 12시 50분 출발한 <골프위크(Golfweek)> 코스 패널 아니냐고 물었다. 나와 함께 플레이를 하기로 클럽에서 배정한 회원은 금융계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남은 여섯 홀을 플레이하며 알게 된 사실은,이곳이 타라 이티와 더 힐스 다음으로 뉴질랜드에서 가장 배타적인 클럽이지만,비회원도 누구나 연락을 취하면 플레이할 수 있게 배려해 준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이런 최고급 클럽의 입회비와 연회비는 얼마일까? 입회 시 1700만 원(NZD 20,000)을 납부하고 연회비 620만 원을 내면 그린피가 1년간 면제다. 더불어 40세 이하 회원은 연회비를 50% 할인해 준다. 나는 벤과 톰이 너무 부러웠다. 골프 마니아라면 다음 생에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야 할 것 같았다.
(위) 로열 오클랜드 & 그랜지 GC (아래) 로열 오클랜드 & 그랜지 GC

와이헤케 골프장 와이헤케 골프장에서 경험한 행운과 소중한 추억
이번 여정에서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세계 100대 코스와 동네 맛집 같은 로컬 골프장 총 18곳을 플레이하고 평가했다. 20일 동안 계속된 골프 일정을 3년 전 홀인원을 했던 카우리클리프 골프코스에서 마무리한 후,북섬 끝단의 오푸아 항구에서 네덜란드 친구가 지중해로부터 몰고 온 하세바스 호에 승선했다. 요트에 오르자마자 뱃머리에 위치한 창고 안에 골프백을 꽁꽁 묶어 고정시켰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동안 골프는 잊을 생각이었다.
바람을 타고 항해를 시작한 지 1주일 되던 날,내 계획에 차질 아닌 차질이 생겼다. 와이헤케 섬의 마리나 정박 2일차 아침,모두가 각자의 캐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던 중에 나는 구글에서 골프장을 찾아냈다. 와이헤케(Waiheke Island Golf Club) 골프클럽은 이 섬의 유일한 골프장이었다. 친구에게 “해수욕장 가는 길에 나 좀 내려줘. 10분 거리에 골프장이 있네”라고 말한 뒤 들뜬 마음으로 뱃머리의 창고에 들어갔다.
온몸이 단단히 결박돼 있던 골프가방에서 히코리 클럽 8개만 꺼내어 파라파라우무 GC에서 구입한 작은 골프백에 넣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잠시 후 도착한 코스 입구에 푯말이 하나 붙어 있다. ‘Course closed today’ 휴장이란다.
‘어,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며,운전을 하고 있던 친구에게 일단 클럽하우스까지 가보자고 했다. 클럽하우스 안에서 처음 마주친 여성에게 말했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이곳을 찾아냈는데,오늘 플레이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한국에서 온 코스평론가 준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오늘 골프장에서 단체 행사가 있다며 난처해 했다. 내가 웃으며 행사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플레이하는 것도 괜찮다 말하니,4시간은 걸릴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기는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잠시 후 인자하게 생긴 신사분이 다가왔다. 와이헤케 로터리클럽 회장이었는데,오늘 클럽에서 기부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샷건으로 진행되는 대회에 여성 4인 팀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부상으로 플레이는 못하고 걷기만 하니 그 팀에 조인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한다. 살다 보면 불운으로 알았는데 행운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2인승 카트를 타고 코스를 가로질러 나와 함께할 팀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파5홀에서 티샷을 준비 중이었는데,갑작스러운 이방인의 출현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은 골프 잘 못한다며 주저하는 그들에게,“No worries,we will enjoy the walk together(걱정 마세요. 그냥 함께 산책한다 생각하면 되죠)”라고 말하고,100년 된 히코리 드라이버를 휘둘러 페어웨이 정중앙으로 낮은 탄도의 샷을 날렸다. 그 순간 탄성이 터졌고,그때부터 즐거운 오후가 시작됐다.
여성 4명은 모두 테니스를 치며 만난 사이인데,골프가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다. 기부행사에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둔 건데,가끔은 내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로빈,린다,르네,리즈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두 번째 파5홀 그린에서 롱 퍼트 챌린지가 있었다. 7m 내리막 퍼팅을 앞두고 로빈에게,“내리막에 바람이 뒤에서 불고 있으니,살짝 건드린다는 느낌으로 홀컵 우측 바깥쪽으로 두 컵만 보고 퍼트해 보세요”라고 조언했다.
잠시 후 그녀의 퍼터 헤드를 떠난 공이 내리막을 타고 쭈욱 내려가다 멈추는 듯하더니 슬금슬금 움직여 홀컵 안으로 사라졌다. 환호성과 함께 로빈은 내게 뛰어왔고 하이파이브를 날렸다. 더블보기로 시작한 그들의 라운드는 내가 조인한 후 파 6개와 보기 2개를 기록했고,맛난 점심식사 후 열린 시상식에서 로빈은 롱 퍼트 콘테스트 우승자로 푸짐한 상품을 받았다. 다음 번에 뉴질랜드에 오면 자신들의 테니스클럽에서 함께 플레이하자며 신난 그녀들과 보낸 반나절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골프는 어디서 치는지도 중요하지만,누구와 함께 했는가로 기억된다.
하세바스 요트로 돌아가기 전,와이헤케 클럽의 회장 제프 오크스가 내게 와서 클럽 역사에 대해 설명하며 내 느낌이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제프,이곳은 회원들과 와이헤케 공동체에게 정말 특별한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만든 소중한 추억을 오래 간직할게요. 귀국하면 오늘 저의 경험을 글로 남기고 싶습니다. Ngā manaakitanga(마오리어) 따뜻한 감사와 존중의 마음을 담아,깊은 감사와 축복을 전합니다.”

뉴질랜드는 누구나 쉽게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골프 선진국
뉴질랜드 한 달 살기를 마무리하며 이곳의 다양성을 제대로 경험한 느낌이었다. 리조트를 포함한 대중제 골프장은 그린피가 뉴질랜드 달러로 30에서 850달러까지 천차만별이었다. 회원제 골프장의 문화도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린피가 비싸다고 더 좋은 골프장은 아니었고,더 배타적인 회원제 골프장이 더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저마다 특색이 있고 그 문화를 즐기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었다. 18홀 코스를 걸으며 타 회원들과 어울려 골프를 칠 마음가짐과 건강만 있다면 빈부의 격차와 관계없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준만 된다면 골프를 칠 수 있다는,그것도 회원제 코스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골프 선진국이란 그 나라의 골프 산업 규모로도 평가할 수 있지만,누구나 골프를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와 생활 수준이 가장 중요한 척도인 것이다. 한국의 골프는 과연 무엇이 강점이고 무엇이 단점인지 생각하게 하는 경험이었다.
writer 오상준(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

한국인 최초로 영국에서 골프코스 설계학 석사를 취득한 코스설계자이자 골프 인문학자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골프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역임했으며,코스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과 한국히코리골프협회(www.hickorygolfing.com) 회장으로 골프문화와 코스 미학을 탐구하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